비건 환경운동가는 논비건 환경운동가를 설득하는데 자꾸만 실패한다
식사 자리에서 다른 환경운동가가 대하튀김을 주문했다. 그 모습을 보고 시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슬쩍 말을 던졌다. 🔗IPCC 6차 보고서에서 새우 100g을 먹으면 15kg의 탄소가 나온다고 하더라고요. 돌아온 답은 이랬다.
“이 새우는 탄소 발자국이 적어서 먹어도 돼요. 서양에서 소비하는 새우의 경우 맹그로브 숲을 파괴해서 양식으로 새우를 키우기 때문이라더라고요.”
이런 식의 환경에 좋다 같은 비거니즘 논리는 꽤나 자주 실패했다. GMO로 만들어져 대규모 농작을 하며 농약을 잔뜩 뿌려 키워 캐나다에서 전 세계로 수출되는 카놀라유도 건강에 이롭지도 않고 환경에 좋지도 않지만 비건이긴 하니까. 비건식 그 자체는 환경에도, 건강에도 100% 모두에게 걸맞은 해법을 제시해주지 않는다.
자본주의 세계 속에 있는 한 모두가 자유로울 수 없음을 모두가 알고 있다. 당연히 환경운동가라고 하더라도 석유로 만들어진 옷을 입고, 비행기를 탈 수밖에 없는 일들이 생긴다. 그렇기에 탄소를 줄이기 위해 비건식을 하자고 하는 주장은 개인이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영역이라고 다가서는 것 같다.
소가 메탄의 주범이 될 때 소는 기술혁신의 대상이 된다
애당초 실패의 원인은 내가 던진 논리 안에 있다. 축산업과 탄소 배출량을 연결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인간중심주의를 기초해야만 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축산업은 법적으로 지정한 특정 종들을 인간의 소유물, 즉 사고 팔 수 있는 물건으로 전제한다. 축산업의 문제로 탄소 배출을 지적한다는 건 동물을 소유의 객체로서 보는 개념을 비판하는 게 아니다. 비건들은 탄소 배출의 문제로 고기 소비를 멈추길 바라지만, 산업계와 소비자는 축산업 자체에 대한 전면적 수정이 아닌, 시스템 내부를 조금씩만 고쳐나간다. 산업에서 해결책은 기술이며, 그 산업의 상품인 동물들은 기술 혁신의 대상이 된다. 그렇게 축산업은 🔗소에게 벌을 주며 배변 훈련 통해 대소변을 가리도록 하고, 육지 동물인 소에게 해조류를 먹여가며 탄소를 감축했음을 홍보한다. 생명 존중, 생명 자체로서의 존엄에 대한 고민인 비거니즘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고래를 죽이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탄소 포집원이 될 때
세계적으로 고래 보호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최근 연구를 통해 고래는 죽어서도 이산화탄소를 몸 안에 가둬 심해 속에 이산화탄소가 나오지 못하도록 함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들의 배변물까지도 바다의 플랑크톤이 잘 서식할 수 있는 배양분의 역할을 한다고 하니 기후위기 시대에 꼭 필요한 존재로 부각된다. (기사 출처 : 🔗고래 똥의 가치가 이 정도라고?) 이런 과학적 사실들을 바탕으로 고래 한 마리가 인류에게 “제공”하는 “생태계 서비스”가 25억 원이라며 연구와 기사들에선 연신 고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근데 문장이 어딘가 찝찝하다. 고래가 탄소 배출을 해왔다면 고래는 죽여야 하는 존재가 됐을까? 탄소를 줄여야 한다는 시대적 가치는 결국 인간이 만든 것이고, 우연히 고래가 지금의 세계의 이득과 부합해서 이들을 지켜야 하는 것 아닌가. 연구는 고래 생명 자체의 존엄성을 옹호하지 않는다. 25억이라고 가격표를 매기는 순간 고래는 자본주의에서 끊임없이 인간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시험 받아야 한다. 오히려 고래에게서 “생태계 서비스” 25억이 넘는 “경제적” 이익을 기업이 만들어낸다면 탄소배출권을 내면서 고래를 죽이겠다 할 지도 모른다.
과학은 우리가 얼마나 모르는지 알게 한다
인류는 고래가 탄소를 저장하는 능력을 21세기가 되어서야 겨우 알아냈다. 연구가 이런 비밀을 알아가면 좋겠지만 대부분의 연구비는 돈이 되는 산업에 몰려있다. 의료 부문 연구만 해도 피부과와 다이어트, 탈모와 같은 돈이 되는 산업에 투자가 몰린다. 반면 순수과학의 영역, 그중에서도 자연 가치를 파악하는데 배정된 연구 금액은 미미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발견되지도 않은 수많은 종의 가치는 알 지조차 못할 것이다. 알고 있는 종들 마저도 매일 이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있다. 몇 백 년 된 숲들은 방화, 목축, 화전, 석유 시추, 가구 제작 등 수많은 이유로 없어지고 있다. 과학적으로 모든 존재에 대한 가치를 증명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증명해냈더라도 멸종된 종들은 구할 수 없을 정도로 늦었을 때일 것이다.
연구를 보면서 나는 과학을 통해 ‘얼마나 정확하고 명확하게 알게 되었는지’ 보다, 얼마나 우리가 모르고 있었는가를 느꼈다. 영화 ‘아바타’에서처럼 다른 종들과 신경이 연결되어 있지 않더라도 타자와 연결 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 이 지구에서 태어난 존재라면 다른 존재에게 연결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과학은 작은 사실들을 밝혀나갈 뿐이지만, 인간은 그 작은 사실들로 세상에 대해 더 넓게 이해할 힘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과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생명의 존엄성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과, 그것을 제도로 실현할 수 있는 체계 역시 가지고 있다.
탄소흡수원 고래가 아니라, 초음파를 듣는 고래의 세계가 궁금하다
책 <물고기는 알고 있다>(조너선 벨컴, 2017)에서는 물살이가 고통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충격을 가해본다. 수많은 논문이 수치를 통해, 실험을 통해 물살이들이 고통을 느낌을 발견해낸다. 마치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시기에 백인들이 흑인 노예들이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생각하며 고통에 대한 실험했던 시기와 흡사한 모습이었다. 이 책을 읽으며 과학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종차별로 인류가 공감하고 느낄 수 있었던 세계를 잃었음에 슬퍼했다.
기후정의를 상상할 때 인류가 중심에 있지 않길 바란다. 육지동물이 바다식물을 먹어서 메탄 방귀를 덜 뀌고 인간들이 여전히 많은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사회를 풍요로운 사회라고 이름붙일 수 없다. 과학이 바닷물 1도가 오른다는 사실과 함께 그런 변화가 해양생명체들에게는 인간에게 10도의 변화와 맞먹는다는 해석을 덧붙여줬으면 좋겠다. 연어가 지구 반 바퀴 너머에서 자신들이 떠나온 고향의 물 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과학적 사실로 알게 될 때, 이들이 석유가 새어 나온 바다에서 느낄 고통을 함께 설명해줬으면 한다. 고래들이 초음파로 소통해 지구 반대편 소리를 듣는다는 과학적 사실을 알게 될 때, 뱃고동 소리에 고통스럽지 않기를 바랐으면 한다. 돌고래의 공감 능력과 지능을 과학적으로 알게 될 때, 이들이 아쿠아리움에 갇혀 쇼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게 됐으면 좋겠다.
동물들이 이 세상을 어떻게 느끼는지 (아주 조금이겠지만) 알고선 플라스틱을 안 쓰는 것, 옷을 덜 사는 것이 기꺼워지는 걸 넘어서 간절해졌다. 비건 실천 역시 고기를 먹고 싶은데 참는 것이 아닌 존재와 연결되는 풍요로운 경험으로 바뀌게 됐다. 환경을 위한 노력이 인내와 절제의 영역이 아니라 공생과 공존의 감각으로 변하게 됐다.
과학이 살아있는 존재가 얼마나 탄소배출을 하는가 계산하는 것처럼 인간중심적인 시선으로 자연을 보기를 멀리했으면 한다. 종을 넘어 타자를 공감할 수 있는 언어가 되어줬으면 좋겠다. 우리의 공감이 좀 더 차별을 넘어 가닿을 수 있도록 말이다.
글 박이윤정 홍보팀 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