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기지 주변에는 왜 채식 가게가 많을까?

① 언제부터 이태원에는 이방인들이 모이게 된 걸까?

지나가는 사람들의 반이 이주민인 곳, 바로 이태원과 해방촌이다. 언제부터 이방인들이 이태원으로 모이기 시작했는지에 대한 역사를 찾다 보니 조선시대까지 거슬러 내려가야 했다.

이방인의 역사가 오래된 만큼 이태원의 지명 자체에 이방인들의 역사가 스며있었다. 이태원(梨泰院)의 ‘원’은 장호원, 조치원, 사리원, 퇴계원, 같이 교통의 요지에 설치되는 역원의 명칭에서 동명이 유래됐다. 거기서 ‘이태’의 어원을 좀 더 들여다보자. 이태원은 지리적으로 한강을 통해 경복궁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이 때문에 임진왜란 당시 왜군인 ‘이타인(異他人)’들이 귀화하고 사는 지역이라는 데에서 이태원의 어원을 추측하는 학설이 있다.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임진왜란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일본인과 그 사이에 성폭행을 당한 여성과 그들의 아이들이 모여 살던 동네로, 다를 이(異), 태반 태(胎)자를 써서 이태원(異胎圓)으로 불렸다는 학설도 이어진다. 어원에 대한 다양한 학설이 있지만 조선시대부터 이태원이 이방인 공동체로 인식됐다는 데에는 학설에 이견이 없다.

지금의 이태원과 해방촌의 모습은 어떻게 자리잡힌 걸까?

전 세계인들이 이태원으로 모이게 된 건 군용지로 이태원이 쓰이고 난 이후이다. 1882년에서 1884년 임오군란을 진압하러 온 청나라 부대가 이태원에 주둔하면서부터가 그 시작이다. 일제 강점기부터는 일본군 사령지로, 광복 이후에는 미8군이 주둔하며 이태원동과 한남동, 용산2가, 4가동은 ‘군용지 인근의 배후지’로서 인식되기 시작했다. 

1953년 6·25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미군이 이태원 상권을 주도하는 동시에 6.25전쟁에 참전한 터키군들이 남아 서울에서 이슬람 포교 활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1957년부터 미군의 외박과 외출이 허용되면서 미군을 접대하기 위한 기지촌이 생겨났다. 1960년대에는 정부 중심으로 이태원 미군기지 주변의 서빙고동, 한남동, 동부 이촌동 일대에 외국인 전용주택과 아파트, 고급 외국인 주택단지를 건설했다. 그러자 1960년대 이후 각국 대사관이 이태원 지역으로 오기 시작했다. 1970년대 미군기지 PX에서 나온 이국 물자들이 이태원 시장을 채웠다. 1970년대 초반에는 부평의 미8군 121 후송병원이 용산으로 이동하면서 미군 기지 재배치가 일어나면서 군부대 종사자와 주변 상인, 기지촌 성 노동자도 이태원으로 이주했다. 그 주변으로 미국식 클럽이 들어서며 지금과 같은 풍경을 갖추기 시작했다. 동시기, 박정희 정권 아래 오일쇼크가 겹치면서 친아랍정책의 기조 아래 중동 건설 근로자들이 국내에 유입되면서 이태원에 이슬람 사원이 들어섰다. 그 주변으로 1980년대부터 동남아시아와 서남아시아 출신 이민자들이 모이면서 지금의 이슬람 거리가 형성됐다.

 

③ 그럼 왜 이태원에는 채식 옵션이 있는 가게들과 비건 식당들이 많을까?

사람이 들어서는 자리에는 문화도 들어선다. 이슬람 사원이 들어오면서 할랄 재료를 쓴 가게들이 들어선 것처럼 이주민들의 식습관 문화도 들어섰다. 아프리카, 중동 음식 거리와 같은 이국적인 골목에서 흥미로운 건 이슬람 문화권이 아닌데도 비건 가게, 비건 옵션이 있는 가게다. 

사실 이태원은 한국에서 비건이라는 개념이 대중화되기 이전부터 채식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주 약속의 장소가 됐던 지역이다. 오래 사랑받으며 지금까지 자리를 지켜온 비건 식당들 역시 이태원에 밀집해있다. 이는 윤리적, 환경적 이유로 채식을 동물권 관점의 운동이 서구권에서 처음 생겼기 때문이라고 필자는 본다. 이방인을 통해 채식 문화 역시 함께 들어온 것이다. 

 

공장식 축산의 시작은 19세기 산업혁명의 시대, 포드에서 대량생산 시스템이 들어서면서 축산에도 해당 시스템을 적용하면서부터다.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좁은 스톨을 이용해 가축 밀집 사육 방식을 채택하여 공장형 대량 생산화를 도입했다. 이러한 비윤리적 전환을 목도한 영국에서 동시대 완전 채식에 대한 화두를 던졌고, 1847년 최초의 채식주의 단체가 결성됐다. 공장식 축산이 산업적으로 정착되고 1869년 우역이 돌았을 때 영국 정부에서 처음으로 국가적으로 가축 전염병에 개입하며 동물들을 살처분했다. 이후 미국, 캐나다, 호주 역시 영국의 가축 전염병 대응법을 모방했다. 살처분이라는 동물에 대한 국가적인 폭력이 100년이 넘게 자행된 후에 1970년대에야 호주의 윤리 철학자 피터 싱어가 ‘동물권’이라는 개념을 소개했다. 

공장식 축산 체계와 이에 대한 비판, 동물권 개념 역시 서구 사회에서 개발되고 논의되었기에 서구의 이방인들에게는 현대의 축산업의 역사와 궤를 잇는 식탁 위의 투쟁이자 문화인 것이다. 그렇기에 환경적, 윤리적 이유 아래 채식을 이태원이라는 공간에서도 이어갈 수 있었다. 비건 문화가 MZ세대의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 한때의 패션이나 힙한 젊은이들의 문화로만 치부되기 어려운 배경이 여기에 있다.

이제 한국에서는 버스에서도 ‘비건’이라는 단어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 배경에는 우리의 식탁에 한 끼도 빠짐없이 올라오는 동물들을 보며,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외와 한국의 공장식 축산의 방법은 다르지 않고 이들을 처리하는 법적인 지위나 체계, 전염병 대응 방식은 똑같다. 우리가 들여온 공장식 축산이 무엇인지 다양성이 공존하는 이태원은 묻고 있다. 이제 동물권은 이태원 옆의 이방인들만 묻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가는 식당에는 비건 옵션이, 우리가 사는 동네에는 비건 식당이 있는가? 오늘 이 글을 읽고 검색창에 한 번 쳐보자. 생각보다 주변에 많을지도 모른다. 

TIP
[카카오맵] 서울 비건&비건 옵션 채식 식당 정리 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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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삐삐 활동가 

<비건이건 아니건>은 말 그대로 내가 비건이건! 네가 비건이 아니건! 우리가 조금씩 비건 지향 생활을 시작해볼 수 있도록 기획되었어요. 비거니즘과 조금 더 친해지는 생활, 한 걸음씩 함께 나아가요.